늦출발하는 경주마는 팬들이 베팅하는데 있어 제법 골칫거리다. ‘이번에도 늦발하면 어쩌나’ 이런 불안감을 늘상 안고 마권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말이 늦발하는 이유는 크게 세가지라고 한다.

첫째, 말 자체의 악벽이 있어 게이트 안에서 요동치거나 기립하다 게이트가 열리며 우왕좌왕 하는 케이스다. 둘째는 발주요원이 게이트가 열릴 때 고삐를 놓아주는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고, 셋째는 기수의 과실이다.

여기서 기수의 과실이라고 한다면 마필과 제대로 호흡을 맞추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승부를 회피하기 위한 고의적 늦발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팬들이 손실을 입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고의성 늦발은 괘씸하고도 악질적인 것이라 팬의 입장에서든 심판자의 입장에서든 ‘특별관리’를 해줄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심판실 한 관계자는 기수들의 고의적 늦발을 적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게이트가 열리면 뛰쳐나가려는 게 경주마의 습성이어서 이를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절하기란 대단히 어렵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정작 기수들의 생각은 다르다. 게이트 안에서 고삐를 바짝 죄었다가 게이트가 열릴 때 한 템포 늦췄다 놓아주면 자연스럽게 늦발이 된다는 것이다. 경주에서 승부를 회피하기에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인 셈이다.

한국 경마에서 고의적 늦발이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스타트부터 맨 뒤에 있다가 그대로 특징 없이 경주를 끝마치곤 했던 말이 어느 날 느닷없이 선행에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없는가 말이다. 혹자는 ‘늦발을 하니 입상을 못 한 거고, 늦발을 하지 않으니 입상한 것 아니냐’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마권 발매 시작부터 발매 마감까지 ‘나 가요’ 이렇게 써놓는 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0마리 나온 경주에서 10위로 출발하고 11마리 나온 경주에선 11위로 출발했던 말이 불과 한 달 새 총알 같은 선행력으로 우승을 했다. 이런 코미디 같은 상황을 두고 조교사의 작전권이고 기수의 절묘한 기승술이라 할 것인가.

반면 다른 예도 있다. 내달쯤 열릴 군별 경마대회에 출전할 것으로 보이는 A라는 말이 해당 군 널널한 편성을 마다하고 빡빡한 외산마 경주에 출전했다. 승군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 말의 기수는 어떻게 말을 탈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기수는 말 가는대로 최선을 다 해 선행에 나왔고 강 편성 속에서 5위를 기록했다. 승군을 못했으니 군별 경마대회엔 출전할 수 있게 됐고 늦발이나 승부를 회피했다는 비난도 면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게 바로 조교사의 작전권인 것이다.

경주마의 습관적인 늦출발이나 이를 통한 기수들의 고의적 승부회피는 사라져야 한다.

재결은 얼마 전부터 과도한 선행경합, 페이스 판단 잘못, 유리한 진로 양보 등과 같은 구체적인 표현을 써 가며 세밀한 제재를 가하고 있다. 잘 드러나지 않는 불공정 플레이에도 손을 대겠다는 의지다.
늦발에 대한 제재도 강화돼야 한다.

경주마에게 악벽이 있다면 이를 정확히 바로 잡고 경주에 출전시키는 게 옳다. 뻔히 늦발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것까지 감안해 마권을 사라고 하는 것은 억지다.

만일 상습적으로 늦발하는 마필이라면 폐출혈마에게 가해지는 것처럼 강도 높은 제재를 적용하는 것도 한 번 고려해 볼 일이다.

기수의 과실로 인한 늦발이라면 이때는 기수기용과 작전권을 쥐고 있는 조교사에게도 연대 책임을 물어 함께 제재를 내리는 게 바람직하다. 승부의지와 관계된 경주전개부적절과 같은 제재를 기수 혼자 감당할 정도로 기수와 조교사의 관계가 정상 정립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조교사 입장에서 억울하다고 생각되면 차후엔 해당 기수를 다시 기용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긍정적인 경마관’을 강조한다. 경주가 끝난 후 ‘갔다, 안갔다’를 따지며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지 말고 결과에 순응하면서 다음 경주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다. 하지만 고의적인 늦발이나 승부회피, 의도적인 승부조작 등이 의심되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한 긍정적인 경마관도 몽상에 불과할 뿐이다.

【편집국 차장 eheek@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