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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고대해는 지금 홀로 공원을 배회하고 있다. 아니, 여인은 거닌다 해야 하겠다. 배회 란 주로 남자, 발정난 수캐나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인간들에게나 해당되는 터, 모름지기 숙녀인 그녀는 고요히 거닐고 있다고 봐야겠다. 특히 그 장소가 고궁인 터에야, 조깅을 하거나 나무에 대고 몸치기를 한다거나 피티체조를 하기에 적당한 곳이라 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허니 고대해는 말없이 이마에 정갈한 그늘을 만들며 연못을 따라 근정전이란지 무슨 당이란지 그러한 건물의 외곽을 따라 조용히 돌고 또 도는 것이다. 때로 꽃잎이 바람에 날려 여인의 발치에 내리고 공중을 나는 새의 날개 그늘이 여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니 한 폭의 그림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여인의 춘심과는 그 내용이 많이 다른, 색심이 가득한 남자가 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 주위를 잠시 배회하다 말을 걸어갈 때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어찌 즉시 화답을 하겠는가. 여자라면 평일 오후 공원에 있는 남자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가질 리 없건만, 어치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남자가 대시할 때 그 여인이 만약 고대해라면 그 남자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 강이라는 남자는 실직한 지 6개월이 넘어 실업수당도 다 타먹고 더 이상 갈 데도 없어 늦은 점심으로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까먹을까 싶어 공원에 들렸다. 그는 청춘남녀 쌍쌍이거나 엄마 아빠 고사리손 삼위일체를 이룬 가족나들이거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느릿느릿 보행이 다이겠거니 예상했으나, 한 여인이 설명하자면 실한 몸매의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고 있었으니, 그녀의 사연을 그렇게 묻어두고 방치한다는 건 좋지 않다는 판단 하에 말을 걸기에 이르렀다. 남자는 여인에게 다가가 "지금 몇 신지 알 수 있습니까"라는 훌륭한 멘트를 날렸다. 여자가 너는 스마트폰도 안 갖고 다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자기는 아무런 기계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자는 둘러맨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듯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들여다보고는 4시 20분 전이네요 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일러주었다. 남자는 약간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은 조요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4월의 하늘 아래였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