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한 말 ‘영웅’
‘영웅’이란 녀석은 그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말이다. 당시만 해도 수입돼 들어온 유능한 말들이 많지 않았다. 대다수 말들은 경마장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불용 처리돼 승마용 말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영웅’도 이런 말 중 한 마리였다. 녀석과 난 지속해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로 항상 녀석을 돌보아야만 했기에 녀석과 함께한 시간은 아주 길었다.

‘영웅’은 첫 경기에 출전한 내게 1등이라는 영광을 선물해줬지만 그 후에는 내가 직접 녀석을 타고 경기에 출전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영웅’ 녀석은 우리 승마장의 매우 중요한 말로 성장한 인기 있는 말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을 타고 대회에 출전하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대신 내게는 녀석을 항상 닦아주거나 평보를 시켜주는 등 녀석의 복지에 기여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영웅’을 알아본 L 감독님
‘영웅’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전 상무 승마팀 감독인 L 감독님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당시 L 감독님은 우리 승마장에서 운동을 하셨고, 녀석을 직접 조교하셨다. 녀석의 남다른 능력을 알아본 L 감독님은 녀석을 애지중지 다루셨다. 녀석의 앞다리 한쪽은 다른 한쪽에 비해 많이 두툼했다. 승마용 말로 넘어오기 전 경마를 하다가 늘어난 인대가 부어올라 굳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L 감독님은 ‘영웅’ 녀석을 운동시킬 때는 항상 양쪽 앞다리에 붕대를 감고 운동을 했다. 지금은 운동 붕대가 넓고 두툼하며, 안쪽에 좋은 패드를 대 사용하지만 당시 경마장에서 사용하는 붕대는 100% 면으로 지금에 비해 기능성도 현저히 낮고 탄력성도 거의 없었다.

붕대감기
붕대를 말들에게 감으려면 많이 조심해야 했고, 나도 녀석의 앞다리에 붕대를 감을 때마다 많은 꾸중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붕대는 한 번 사용하고 나서 반드시 손수 물로 깨끗이 세탁하고 그늘에 말려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나마 조금 있는 탄력성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말릴 때도 잘 펴서 말려야만 다시 사용할 때 좋은 상태가 된다. 특히 겨울철이 되면 더욱 고생스러웠다. 당시 더운물이 필요하면 난로 위에 주전자로 물을 데워서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자질구레한 일은 그냥 찬물로 했었고, 얼음물과 같은 찬물로 붕대를 세탁하려면 몇 번이고 시린 손을 입에 갖다 대고 호호 불어야만 했다.



말갈기 땋기
그리고 L 감독님은 말갈기 땋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아주 자주 녀석의 갈기를 땋았다. 난 이때마다 손아귀가 아파서 말갈기 땋는 게 너무 싫었다. 그 이유는 ‘영웅’ 녀석은 머리를 땋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녀석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거나 위아래로 많이 움직였다.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L 감독님은 우리 중 한 명을 불러서 녀석의 양쪽 귀를 번갈아가며 움직이지 못하게 힘을 줘 힘껏 잡게 하셨다. 또 그때 갈기를 땋는 L 감독님은 왜 그리 늦게 따는지 정말로 거의 다 땋을 때쯤에는 손을 쥘 힘이 없어서 놓고만 싶었다. 갈기를 다 따고 나면 양쪽 팔뚝이 돌멩이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잡고 있던 중에 조금이라도 말이 움직이면 “똑바로 못 잡아” 말하며, 우리를 혼내셨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들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혼나면서 힘들게 갈기 땋는 것을 배워서인지 지금은 갈기를 아주 잘 딴다. 지금도 말갈기를 땋으면서 ‘만약 내게 딸이 있었으면 머리는 참 잘 따줬을 텐데’란 농담을 하기도 한다. 아쉽게도 내게는 딸이 없다.

지긋지긋한 평보
내가 기억하는 녀석의 마지막 모습은 지긋지긋한 평보의 모습이다. 얼마나 평보를 했는지 지금 생각만 해도 지루함이 떠오른다. 왜 꼭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평보를 하도록 지시했는지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매일 훈련 전후에 약 한 시간가량 평보를 했다. 그게 싫어서 우리는 L 감독님을 피해서 숨어 있곤 했는데 막상 L 감독님이 “애들아, 누구 없니?”라고 부르시면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예”하며 뛰쳐나가던 기억이 있다. 당시 L 감독님은 우리에게 정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지루하고 힘든 평보를 가끔 나도 어린 학생들에게 시키고 있다. 우리 학생들도 나중에 성장하고 나면 지금의 나와 같이 과거를 회상할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피어난다.


‘영웅’ 무릎에 눌리다
한번은 녀석을 타고 중장애물 경기에 출전을 하게 됐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나 전성기를 넘긴 녀석의 능력은 전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녀석은 언제나 우승을 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는 무서운 녀석이었다. 당시 시합 장소는 뚝섬 경기장이었고, 대회 이틀 전에 장애물 연습을 하게 됐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녀석은 주특기인 장애물 앞에서 왼쪽으로 쏜살같이 도피하는 모습을 연습 내내 보였다. 이를 보다 못한 교관님께서 급기야 녀석을 타고 있던 날 부르시더니 왼손으로 녀석의 고삐를 움켜잡으시고 오른손에든 채찍으로 녀석의 앞다리 부분에 체벌을 가하셨고 이에 놀란 녀석은 앞발을 들어 올렸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는 잡고 있던 고삐를 당기게 되자 녀석은 힘없이 그대로 뒤로 뒤집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난 녀석 밑에 깔리지는 않았으나 녀석과 함께 넘어졌다. 놀란 녀석은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가 넘어져 있는 내 어깨 부분을 녀석의 무릎 부분으로 눌렀다. 난 깊은 통증을 느꼈지만 당시 상황이 심각해 아픔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시 일어나 끝까지 장애물 연습을 마쳤고 우리는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교관님 댁으로 향했다.



‘파스 한 통’에 담긴 지도자의 마음
출전한 그 대회는 교관님 댁에서 지내면서 시합에 참가를 했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사모님은 정말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교관님께서는 내게 어깨를 한번 보자고 하셨다. 난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그건 그냥 묵살됐고 교관님의 손길은 이미 퍼렇게 멍이든 내 어깨를 살피고 계셨다. 심각하다고 생각하신 교관님께서 이것저것 시켜보시더니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시며 멍든 부위에 당시에 귀하다면 아주 귀한 ‘에어파스’ 한 통을 어깨부위에다 모두 뿌리셨다. 정말로 다쳐서 멍이든 어깨보다 에어파스 한 통을 몽땅 뿌리는 게 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교관님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하고 편치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아이들을 지도해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교관님께서는 오래전에 호주로 이민을 가셔서 생활을 하고 계신다. 교관님의 건승을 빌어본다. 교관님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말갈기 땋기를 좋아하시는 L 감독님 덕분에 지금은 갈기를 아주 잘 딴다. 만약 내게 딸이 있다면 머리 땋기는 정말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내게는 딸이 없다. 1985년 뚝섬승마장에서 선수대표 선서 모습.
▲이제 나도 아이들을 지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보니 당시 지긋지긋할 정도로 평보 훈련을 시키고, 혹독하게 대하신 L 감독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1987년 대한체육회 한일승마대회 결단식 모습.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