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와 함께한 외도
1980년부터 승마를 시작해 2011년 마장마술에 뛰어들기까지 난 철저한 장애물 선수였다. 물론 잠깐씩 필요에 의해서 잠시 외도를 한 적이 몇 차례 있긴 하다. 그중 하나가 ‘백희’ 녀석과의 만남 당시였다. 녀석은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드럽고 윤기가 나는 하얀 털을 갖고 있는 백마 암말이었다. 신장속보를 아주 근사하게 해내는 녀석이었다. 특히, 답보변환을 아주 잘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교육을 나름 잘 받은 말이었다. 승마를 시작한 초기에 난 녀석을 운동시키면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신장속보가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고, 답보변환, Half-pass 등의 방법도 알게 됐다. 이 밖에도 아주 많은 것을 녀석에게 배웠고, 함께 대회에 출전해 입상도 여러 번 했다.

겁도 없이 각종 동작에 도전하다
가끔 교관님께서 승마장에 나오시지 않는 날이 되면 난 녀석을 타면서 마장마술 과목 중 궁금하던 것들을 마음껏 해봤다. 교관님이 계시면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한 동작들을 말이다. 4보 답보변환부터 3보, 2보까지. 심지어 1보를 해보려고 무진 공을 들이기도 했다. 1보 답보는 두 번까지만 했던 걸 기억되지만, 나머지 답보는 그래도 준수하게 했던 것 같다. 그 외에 Half-pass, 구보 삐루엣, 신장 속보 등 당시 내 승마 실력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겁도 없이 했던 거다. 심지어 교관님이 승마장 사무실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답보변환을 하기도 했다. 아마 교관님께서 보시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셨던 것 같다. 초보 승마 실력으로 무리해서 운동을 시켜서인지 말은 운동을 할수록 흥분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신장 속보 시에 신전이 되기보다 걸음이 조금 늘어나며 빠른 속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 시절은 녀석을 운동시키며 많은 것을 배우고, 대회까지 출전해 입상까지 할 수 있어 내겐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대회 후 돌아오는 길
‘백희’와 함께 출전한 승마대회를 마치고 승마장으로 복귀하면서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양양통운 8톤 트럭을 빌려 6두의 말을 싣고 승마장으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암말인 ‘백희’를 맨 앞쪽에 싣고, 다음에 거세마 그리고 뒤쪽엔 수말들을 실었다. 말들을 태운 차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을 지나 사능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금곡까지는 아스팔트로 포장이 된 경춘 국도였지만, 금곡에서 사능으로 가는 길은 시작되는 부분만 짧게 시멘트 포장이 돼 있고 군데군데 과속방지턱이 설치돼있었다. 이 도로로 말을 싣고 가는 것은 마치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긴장됐다,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차는 심하게 덜컹거렸고 흔들림에 말들도 심하게 요동을 치곤 했다.

발이 빠져버린 ‘백희’
아슬아슬하게 차가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 갑자기 맨 앞쪽에 실려 있던 ‘백희’에게 사고가 났다. 차가 방지턱을 넘는 순간, ‘백희’의 왼쪽 뒷다리가 차량 앞쪽에 나 있는 구멍에 빠져버린 것이다. 당시 양양통운 차량 앞쪽에는 가로, 세로 60cm가량 되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은 나무로 만든 뚜껑이 덮여있었지만 방지턱을 넘으면서 생긴 충격의 힘을 견디지 못한 거다. ‘백희’ 녀석은 일어서려고 발버둥 쳤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발버둥으로 허벅지에 찰과상만 더해갈 뿐이었다. 차 밑으로는 피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교관님은 일단 녀석이 겁에 질려 버둥거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셨다. 내게 차 위로 올라가서 녀석을 달래라고 하셨다. 난 금방 올라가서 녀석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녀석의 눈빛은 공포에 질려있었고 곧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거렸다.

급박했던 순간
잠시 후 교관님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공사장 쪽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는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그중에도 녀석은 잠시 쉬었다가 조금이라도 숨이 돌아오는 듯만 하면 다시 혼자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가 아무리 진정을 시키려고 해도 진정은 고사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축적되면 발버둥 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눈빛은 엄습해오는 공포와 고통으로 붉게 변했고, 온몸의 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이 팽창돼 있었다. 녀석의 처절함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발버둥 칠 때마다 녀석의 상처는 깊어져만 갔다. 흐르는 진땀과 흘러나오는 피가 범벅되면서 그야말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할 정도였다.

합판 구출 작전
급하게 공사장으로 뛰어간 교관님이 공사장 인부와 뭐라 말씀하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부와 말을 마친 교관님은 인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건축 자재가 쌓여있는 곳으로 급하게 갔다. 잠시 후 합판 세 개를 빌려 오셨고, 날 포함한 4명을 모두 불러 수송차 밑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짐작한 우리는 방법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차 밑으로 들어가서 차 바닥과 도로 바닥 중간까지 내려와 있는 녀석의 발밑으로 합판을 뒤집어서 놓았다. 좁은 차 밑에서 힘을 쓴다는 게 너무 어려웠지만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합판을 들어 올렸다. 힘을 충분히 쓰지 못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들어 올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녀석이 혹시나 놀라서 몸부림치다가 더욱 다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온 힘을 다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녀석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교관님은 소심한 우리에게 큰 목소리로 외치셨다. “다시 하는데 이번에는 반듯이 들어 올려야 한다”라고.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포기하지 않고 교관님의 구령에 맞춰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들어 올리는 것을 실패할 때마다 녀석은 거세게 발버둥을 쳤고, 진정될 때를 기다려 재차 들어 올려야만 했다. 그 시간이 왜 그리 길던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우리는 좁은 차 밑에서 힘쓰는 방법을 점점 터득하게 됐다. 들어 올리려고 시도할수록 점차 높이 들어 올리게 됐다. 교관님께서 잠시 쉬자고 말씀하셨고 이때는 누구랄 것도 없이 쉬면서도 힘을 효과적으로 쓸 방법을 생각했다. 쉬면서 힘을 비축한 우리는 교관님의 신호에 맞추어서 힘을 몰아서 들어 올렸고 녀석도 이를 알았는지 일어나려는 발버둥과 함께 악몽과 같은 시간을 빠져나왔다. 교관님께서는 그래도 방심하시지 않으시고 나보고 올라가서 녀석이 다시 빠지지 않도록 진정시키라고 하셨다.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녀석에게 갈 때까지 차 밑에서 합판을 등으로 받치고 있었다. 녀석은 다리에 심한 찰과상을 입었지만 불안에서 벗어나서인지 몰아쉬던 숨을 골라가며 스스로 진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녀석이 진정되자 뚜껑을 수리해서 다시 덮었고, 그 처절한 광경을 보고 놀란 기사님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에 조심을 더해 무사히 승마장에 도착했다. 그 뒤로 근 3개월가량에 걸쳐 녀석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3개월 만에 치료가 끝났고 다시 천천히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필 수송에는 만전을 기하라
‘급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처럼 마필 운송에는 항상 만전을 기해야 한다. 혹시나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자칫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고를 막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마필 운송 중에는 완벽을 기했다고 해도 언제 어느 때 사고가 날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완벽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만약 운송 중 사고가 발생했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만약 이때 급한 마음에 합판으로 들어 올릴 생각을 못했다면 아마도 녀석은 회복할 수 없는 큰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가끔 교관님께서 승마장에 나오시지 않는 날이 되면 난 교관님이 계시면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한 동작들을 마음껏 해봤다. 당시 내 승마 실력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겁도 없이 했던 거다. 1981년 `백희`와 함께.

▲‘급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처럼 마필 운송에는 항상 만전을 기해야 한다. 만약 운송 중 사고가 발생했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냉철하게 판단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1983년 `백희`와 함께 뚝섬 승마장에서 열린 대회 출전 당시 모습.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